수천 년 전부터 형성된 동아시아의 우주관 및 세계관은 한의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의학의 기본 이론인 음양오행론이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학문입니다. 머리속에서만 상상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체에 직접 사용하여 입증하는 학문입니다.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장 실증적인 학문입니다.
실험실에서 아무리 좋은 데이터를 내더라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실험이 한의학의 누적된 경험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인류가 먹어 온 음식 중 약이 되는 동식물은 아주 많은 시간과 직접 인체에 적용해 온 일종의 생체실험을 통해 누적된 경험의 산실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스스로 터득해서 식품과 약품을 구분했습니다. 30년을 한 세대라고 치고 35만 년 전에 나타난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부터 계산을 한다 하더라도, 1만 번 이상의 좋고 나쁜 경험의 데이터가 바이너리 구조에 따라 걸러지는 생체실험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중에는 독초를 먹고 생명을 잃기도 했을 것이고 반대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비록 문자가 없던 시절이지만 생명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구전해서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낫는다’, ‘낫지 않는다’는 이분법으로 부모세대가 자식세대에게 경험을 전수할 때 치료가 되지 않는 것은 버리고 치료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실험입니다. 몸으로 직접 체험한 임상실험을 한 번 하는데 30년 걸리는 실험을 1만 번을 해 왔으니 이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한 실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미국 FDA에서는 한약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임상실험에서 동물실험이 면제되고 있습니다.
수억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생체실험의 경험의학은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로 책으로 만들어져 전수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의학서적은 『황제내경』입니다. 기원전 221년 지금부터 약 2200년 전의 서적입니다. 이 책은 그 당시까지 내려온 의학의 이론과 실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이미 예방의학과 생리, 병리, 심리, 경락학설, 침·뜸과 같은 진단과 치료법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상당한 수준의 의학 개념과 실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황제내경』에서는 침술이 동방에서 유래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중국은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 불렀으며 여기에서 침술이 시작되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가(道家)의 서적 중의 하나인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역시 침술이 동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제내경』에서 옹호하고 있는 선구적 이론과 실천법은 약 2,2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적용되고 있으며 한의학 연구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이후에 수백 년 동안 문화적 교류와 소통을 통해 『황제내경』은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고 및 많은 유럽 국가에 소개되어 엄청난 관심을 끌었고, 전 세계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연구개발을 널리 활성화하였습니다. 또한 『황제내경』에서 질병의 예방과 조기 치료를 강조하는 것은 세계보건기구가 제시한 21세기의 건강 개념과 일치합니다. 그 후로 한의학은 전 세계에서 수천 권의 서적과 논문이 발간되어 왔고, 수많은 국내외 한의학 연구자들이 인류의 건강에 중요한 자리매김을 해왔습니다.
일례를 들면 약 1700년 전인 서기 340년경에 갈홍이 저술한 중국 고대 의학서적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 기록된 한약재 청호(靑蒿)는 말라리아 치료제로 개발되어 수 백만명의 생명을 살렸고, 이를 연구한 중의학자 투유유는 2015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약들이 천연물에서 개발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다고 봅니다. 아직도 치료제가 없어 해결하지 못한 질병이 치매뿐 아니라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자 역시 인류의 보배인 한의학에서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